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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기억의 육화 Enfleshment of Memory_기억에 대한 시론들 ; 記憶の肉化_記憶についての試論


할머니는 알츠하이머이다. 그녀는 서울의 나의 집에 방문하면 자신의 집에 가겠다며 신발장을 기어코 찾아가 본인의 신발을 확인한다. 그리고 족히 50년 정도는 살아온 본인의 집에서도 집을 찾는다. 할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할머니의 장소는 어디인가. 할머니가 정주할 수 있는, 살 수 있는 집은 어디인가? 그녀는 여러가지 노래는 잘 부른다. 나는 하나의 노래도 제대로 외워 부르지 못하는데, 주크박스마냥 끊임 없이 나오는 그녀의 노래들은 그녀가 알츠하이머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거의 자동적으로 기계처럼 부르는데, 잘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본 아주 작은 기억 속에 그녀는 늘 어떠한 욕심도 가지지 않은 인자한, 자식과 손자손녀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집에서의 일을 강요받던 전통적 시대의 온화하고도 고달픈 여성이었지만, 일요일 12시쯤이면 하는 ‘전국노래자랑’ 이라는 프로그램 에만큼은 욕심을 냈었다. 모든 것을 주위에 맞추는 그녀가 타인에 기준에서 보면 욕심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12시쯤이면 그 채녈을 지그시 얘기했다. “전국 노래자랑 하는 시간 아녀?” 심지어 틀라는 요구도 아닌 시간이지 않냐는 다소 회유적인 그런 아무렇지 않은 말투가 보통의 날에 아무런 의사표시의 의지도 없었던 그녀였기에 그 정도의 표현은 “전국노래자랑 좀 틀어봐!!”라고 강하게 외치는 수준이었다. 할머니는 노래만큼은 꼭 놓치고 싶지 않았구나, 많은 고단한 전통사회의 여성의 일들에도, 알코올 중독이었던 할아버지의 주사에도 무디게 버티고 한마디 불평도 늘어놓지 않던 그녀에게 전국노래자랑의 일반인의 노래 들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욕망이었구나. 또 그녀는 한 이불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 옆에 누워 자고 있다 살짝 잠이 깨어 눈이 떠질 때 문득 문득 나를 향해 옆으로 누운 채 눈을 뜨고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누굴까 생각하는 것도 같고, 무슨 생각으로 날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누군지 모를 내가 옆에 누워있음에도 이따금씩 나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떤 이불에 대해 얘기했다.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아마 이사 올 때 가지고온 이불이라던지, 자신의 장소 혹은 위치가 바뀔 때에 챙겨왔다는 맥락이었다. 나의 모국에서는 여성이 시집을 가면 비단과 목화솜으로 만든 이불을 혼수로 해가는 문화가 있었다. 보통은 없는 살림에 겨우겨우 돈을 모아 비싼 이불을 사주거나, 혹은 더욱이 헌신적인 엄마라면 그 이불에 수를 한땀 한땀 놓는 것이다. 지금도 이벤트적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으나, 보통은 우리 엄마세대 위의 일이다.

망각 알츠하이머, 기억을 잃게 하는 그 어떤 기제는 왜 모든 영역에 일괄적으로 작용치 않고 무엇은 기억하고 무엇은 망각하게 만드는 것일까? 망각하고 있는 할머니의 집,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도 찾고 있는 집은 어디이고 무슨 모양일까? 그 망각이 기억이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무언가의 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억의 지향성 늘 나는 기억을 다룸에 있어서 과거에서 그 기억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기억이 다가가서 영향을 주는 것은 항상 현재 혹은 미래였다. 그렇다면 기억이 향하는 방향은 과거의 어느 지점을 가르키는 듯 보이 지만 늘 앞을 향하고 있지 않을까? 그곳에 기억의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굳이 과거로 돌아간 시점의 기억이라는 것을 다루겠다고 구태여 위선적이 되지는 말자. 어쩌면 지금과 앞을 향해 운동하고 있는 나의 몸과 시간과 공간 안에서 기억이 가지는 잠재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 기억의 물신성 동시대가 가진 가치척도는 굉장히 많은 분야에서 기억을 물신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치사회적으로는 역사를 대문자 히스토리로 상정하고 기억의 반대편에 세워 공적을 전부 부정한다던지, 심지어는 아주 일상적 영역에서도 나의 잊어버린 웹 어카운트를 찾기 위해서 당신이 키운 첫 반려견의 이름 등과 같은 아주 사적인 기억에 의존한다던지, 사회 전반에서 당연시 기억은 그 사람의 존재를 혹은 실존을 인정하는 역할을 도맡아 오고 있다. 우리 할머니의 초상권과 허락

그렇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돌아가, 알츠하이머의 할머니의 존재는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까. 기억에 대한 작품을 만드는 와중에도 문제는 따른다. 기억을 잃은 할머니를 피사체로 영상화 하거나 할 때, 그허락과 초상권의 문제는 과연 누구에게 돌아갈까. 만약 그녀가 기억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어코 허락을 받을 수 없다면 그녀는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그리고 사회적으로 바라본다면, 아니면 극적 으로 더 작은 세계, 아이덴티티가 끈질기게 강요되는 예술계 같은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결코 본인의 입으로 말 할 수 없으니 그녀는 인간으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인걸까? 동시대의 오리지널리티 아이덴티티에 대한 강박 동시대는 굉장한 피로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지친 경쟁사회 속의 하루하루 일과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무사진 한 장이 찍고 싶어도, 혹은 아이들의 뛰어노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도 손쉽게 그것을 찍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유화의 성격을 띠어가려고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없다. 일말의 공통의 자유도 없는 세상이 가까워지는 듯 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매번 긍적적 에너지로 전환시키거나 갱신해나가야 한다는 강박, 혹은 그러한 자기실현이나 아이덴티티에의 강박의 심부에는 어쩌면 기억물신성도 역할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자이크 기법의 가능성(불가능성) 모자이크 기법은 우리 인터넷사회에서 아주 빈번히 사용되는 기술이 되었다. 모든 내가 아닌 타인의 권리에 대해, 성적인 무언가에 대해, 아니면 범죄자의 얼굴에 대해... 권리와 억압 자유의 영역을 그 픽셀화된 레이어 하나 사이로 왕복한다.

여전히 생각해야 할 것들

노인과 기억

역사와 기억

기억의 사적공간과 공적공간

기억법

기억과 신체 (기억의 육화 enfleshment of memories)

기억과 물질

기억의 재현

논픽션과 픽션이라는 이중구조

기억과 내러티브

기억과 현대

기억의 잔상

기억과 편집

기억에 있어서 편집이 가지는 네거티브함.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차용, 잃어버린 집을 찾아서

<記憶の肉化 Enfleshment of Memory>_記憶についての試論

ばあちゃんはアルツハイマーだ。彼女はソウルの私の家を訪ねると自分の家に行くって言いながら靴棚にきっと足を運んで本人の靴を確認する。そして優に50年ほどは住んできた本人の家でも家を探す。ばあちゃんの家はどこであるか。 ばあちゃんの場所はどこであるか。 ばあちゃんが定住できる、住める家はどこか。

彼女はいろんな歌はよく歌う。私は一つの歌もまともに覚えて歌うことができないが、ジュークボックスのように絶えず出てくる彼女の歌は彼女がアルツハイマーを持っていると信じ難いほどだ。ほぼ自動的に機械のように歌うが、よく考えてみると、私が幼い時、ばあちゃんからみたとても小さな記憶の中に彼女はいつもどのような欲も持たない慈しみ深い、子と孫のために献身的に愛を施して、家のことを強要された伝統的時代の温和かつ苦しい女性だったが、日曜日12時ごろににやっている<全国歌自慢>というプログラムには欲を出した。 すべてのことを周囲に合わせる彼女が他人に基準からすれば欲とも言えない水準だが、12時頃には、そのチャンネルをそっと話した。 “全国歌自慢する時間じゃない?" まして切り替えの要求でもないその時間ではないかという多少懐柔的なそんな何気ない言葉遣いが、普通の日に何の意思表示の意志もなかった彼女だったので、その程度の表現は"全国歌自慢をちょっとつけてみて!!"と強く叫ぶほどだった。ばあちゃんは歌だけは必ず逃したくなかったか、多くの疲れ果てた伝統社会の女性のことにも、アルコール中毒だったじいちゃんの酒乱にも鈍く耐えて一言も文句を言わなかった彼女に、全国歌自慢の一般人の歌は何よりも強い欲望だったのか。

また、彼女は一つの布団を覚えていた。私が彼女の横に横になって寝ているとき、そっと目が覚めるたびに、ふと私に向かって横になったまま目を覚まして私を見守っていた。おそらく私が誰であろうか考え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し、何を考えているのかは分からないが,彼女は誰だか知らない私がそばにいて寝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時々私に布団をかけてあげる。そうするうちに,ある日、布団について話した。よくは覚えていないが、多分引っ越してきた時に持ってきた布団か、自分の場所または位置が変わる時に用意してきたという脈絡だった。私の母国では女性が嫁いだら絹と綿で作った布団を嫁入り支度(婚需)に用意していく文化があった。普通は貧しい暮らしにもやっとお金を貯めて高い布団を購入したり、さらに献身的な母親ならその布団に縫いとりをしたりする。今もイベント的に残ってるか分からないけど、普通は私の母世代の上のことだ。

忘却

アルツハイマー、記憶を失わせるあらゆる機制はなぜすべての領域に一括して働かず、何かは記憶し何かは忘却させるのだろうか。忘却しているばあちゃんの家、しかし彼女がそこまで探している家はどこであり,どんな形だろうか。その忘却が記憶というプログラムが持つ何かの鍵かもしれない。

記憶の指向性

常に記憶を扱うことにおいて過去でその記憶の正当性を探そうとするが、その記憶が近づいて影響を与えるのは常に現在あるいは未来だった。そうなると記憶の向う方向は過去のある地点を指すように見えるが、常に前を向いているのではないか?そこに記憶の誤謬が生じると思う。それなら、過去に戻った時点の記憶というものを扱うと、あえて偽善的になるな。もしかすると今と前に向かって運動している私の体と時間と空間の中で記憶が持てる潜在性が見えてくるかもしれない。

同時代の記憶の物神性

同時代の持つ価値の尺度は、ものすごく多い分野で記憶を物神化させたりもする。例えば、政治社会的には歴史を大文字ヒストリーと想定し、記憶の反対側に立て功績をすべて否定したり、さらには日常の領域においても私の忘れたウェブアカウントを探すために、あなたが育てた初めてのイヌの名前などの非常に私的な記憶に依存したり、社会全般において当たり前に記憶はその人の存在あるいは実存を認める役割を担ってきている。

うちの祖母の肖像権と許諾

それなら極めて個人的な問題に戻り、アルツハイマーのばあちゃんの存在はどこまで認められるか。記憶に対する作品を作る途中にも問題は伴う。記憶を失ったばあちゃんを被写体で映像化したりするとき、その許諾と肖像権の問題は果たして誰に戻るだろう。彼女が覚えていないのでどうしても許されないのなら、彼女は社会に認められるだろうか。そして社会的に見ていたら,それとも極にもっと小さな世界、アイデンティティが粘り強く強いられる芸術界のようなところで彼女は自分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決して自分の口で言えないから彼女は人間として価値が下がる存在なのか?

同時代のオリジナリティ·アイデンティティーに対する脅迫

同時代は凄く疲労感や無力感を感じさせる。例えば、疲れた競争社会の中で一日一日、日課に行かせ帰宅途中の木の写真一枚が撮りたくても、あるいは子どもたちの遊びの様子がとても美しくても、簡単にそれを撮ることはできない。世の中の全てのことが私有化の性格を帯びていこうとしているような気が否定できない。一抹の共通の自由もない世の中が近づくような感じを受けながらもそれを毎回肯定的エネルギーに転換させたり更新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強迫、あるいはそのような自己実現やアイデンティティへの強迫の深部には、もしかすると記憶物神性も役割し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

モザイク技法の可能性

モザイク技法はうちのインターネット社会で非常に頻繁に使われる技術になった。すべての私ではない他人の権利について、性的な何かについて、または犯罪者の顔に対して··· 権利と抑圧そして自由の領域をそのピクセル化されたレイヤーの一枚の差異に往復する。

老人と記憶

歴史と記憶

記憶の私的空間と公的空間

記憶法

記憶と身体

記憶と物質

記憶の再現

ノンフィクションとフィクションという二重構造

記憶とナラティブ

記憶と現代

記憶の残像

記憶と編集

記憶における編集の持つネガティブさ

プルストの小説で借用、失われた家を探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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