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in yeowool
homes_단상들
diaspora 이주, 이산, 유랑 전 지구화와 함께 이주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일이 되었다. 이산하는 민족과 혼혈하는 문화 근대와 함께 찾아온 예견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이산의 바탕은 아주 다채롭다. 콜로니컬에 의해 이산하거나, 민족의 갈등으로 이산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산하거나 아니면 자본화된 결혼에 의해 이산하거나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그러나 전 지구화의 유행에 대한 반동으로서 찾아온 지방화의 흐름은 우리 세계를 또 한번 갈등의 장소에 피투시킨다. 우리 세계는 혼혈과 함께 출혈하고 있다. 증오와 비난 혐오의 .만연 그것 역시 혼혈하는 지구에 예견된 일인걸까? -번외 유목민족, 유럽인들의 신대륙탐험, 노예의 이송, 유대인 이주 계획, 식민화, 황금만능주의와 이주, 자본주의, 글로벌리즘(전 지구화), 유학, 이민, 강제노동, 전쟁, 난민, 도시계획, 젠트리피케이션 등 나의 이주 나는 자발적 이주자이다. 강제이주나 난민같은 상황으로 수동적 상황이 아닌, 나의 선택에 의해 거처를 옮기고,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거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상징적 힘을 가진다. 피투된 장소, 즉 어머니의 배로부터 세상에 던져져 어느 한 경계의 안에 소속되고 한 마을에 거처를 잡고 살아간다는 것은 비범할 것 없는 일상적 일이라고 생각할 지모르겠다. 그러나 그 거주함의 비범함은 자아가 위기에 순간에 처해졌을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나는 내 존재에 큰 위험이 처했을때, 더이상 내가 피투된 그 장소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 2의 장소가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이자 도피적인 이주를 택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친구, 가족, 문화, 언어와도 이산되어야 했다. 그것은 거주하는 것을 물리적인 장소의 옮김과 함께 기획해 가는 기투적 삶으로의 여로였 다. 거주는 그냥 집에 사는것과는 다른 문제인지 모른다. 생각하고 있는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일상성에 가려져 잘 획득하기 어려운 날 세우는 자아의 장일지도 모르겠다. 이주는 과연 여전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디아스포라의 문제일까? 수많은 디아스포라가 아닌 모태로부터 거처가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온 자들에게는 과연 망향감같은것이 없는 것일까? 나는 큰 의미에서는 현대인 모두가 이산자의 처지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트 인터넷의 시대, 이제는 태어나서 부터 인터넷을 몸곁에 두는 세대가 성인이 되었다. 그들의 신체감각은 어떤 장소를 고향으로 삼고 있을까? 애초에 고향이 존재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산을 몸에 지고 태어난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산을 몸에 지고 태어났다면, 애초에 고향을 지닌적이 없으니 그것을 잃은 상실감같은것도 없을 것인가? 그것을 잃은 상실감은 느끼지 못할지라도 삭막함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을까? 혹은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에 이동을 거치며 거듭되는 망향을 겪어왔을지도 모른다.
이주에 결부되는 것들 *장소 먼저 물리적인 공간, 풍경이 바뀐다. 그에 의해 생활 방식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언어
*친밀함
*노스탤지어(향수) 집과 관련되는, 심지어는 역사와도 결부되어 나타나는 노스탤지어 *동질화 / 이질화
*유토피아 / 디스토피아
*풍경(-스케이프)
Archive형 전시—-내파하는 표현방출, 자기 안의 궁극의 논리화.
이산하는 집, 부유하는 집, 집이라는 노스탤지어. 그러나 어딘지 모를 안락함과 불안함의 공존이다. 그것이 어쩌면 현대의 이산하는 우리의 불안함과 맞아떨어지면 좋겠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에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불가피하게 혼종돠어 있고 그래서 어쩐지 슬픈예감과도 같은 것이다. 붕 떠있는 집 혹은 바퀴에 의해 굴러다니는 집은 서사적 구조를 띄어도 좋겠다. 이미지와 맞지 않는 서사는 어쩌면 불안함 조성에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