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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문화인류학 논제들


나치정권하에서 대량학살에까지 가는 프로세스를, 단지 ‘잔학‘ ’광기‘ ’비이성‘ 이라는 언어로 정리하는것이 아닌, ‘법의 힘’ ‘대중‘ ‘지지’ ‘직무‘ ‘충실함’ ‘계산‘ ‘생산성’ ‘주술‘이라는 언어를 키워드로서 분석하시오.

왜인지 늘 비판은 쉽다. 비판거리를 발견하는 것도 쉽고, 그것에 대하여 내뱉는 말들도 쉽다. 그러나 그렇게 늘 시도되는 비판 속에 가시처럼, 항상 비판대상은 우리 삶을 반추하고 있어서 비판의 화살 중 몇은 꼭 나에게도 돌아온다. 그런 맥락에서 ‘절대 악’으로 표상된 나치정권의 대량학살은 오랫동안 비판대상이기도 했으나, 우리 삶의 표본 같은 것이기도 했다. 잔혹하고 비이성적이었던 그 간단한 비판거리는, 아주 일반적이고 ‘악’으로 보여지지 않는 평범했던 것들의 점차적 단계를 밟으며 행해졌다. 도래한 근대화에 의한 경제성장과 국가의 부흥, 그리고 그에 의해 평균적으로 상향된 삶의 질을 보장받는 전체적 ‘대중’, 그것은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생산성’을 큰 가치로 두었고, 그에 의해 일의 분업화가 자연스레 퍼지며, ‘직무’ 에 충실히 답하는 성실한 인재상이 어느 시기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물론 히틀러의 이상은 일반적 근대화와는 그 노선을 달리했었으나, 그 때의 자연스러운 주류적 지향성과, 유토피아적 세계상에 대한 욕망은 나치정권하의 대량학살에도 관여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대량학살은 마치 대량생산의 반대어처럼 대량몰생산처럼 다뤄졌다. 수용소의 ‘대중’은 넘버링되어 그 인간적 개인을 상실하고 사물화되어 관리되었으며, 수용소는 나눠진 ‘직무’로 인한 전문가들에 의해 효율 좋은 역할을 하게끔 ‘계산’되어 설계된다. 전문가들은 전문에 의해 특화된 능력을 얻는 대신, 전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들에게 불필요 한 것이 되었으며, 직무에만 오롯이 ‘충실히’ 대답하면 되는 부품적 존재가 되었다. 살충제로 개발된 치클론B가 가스실에서 인간의 대량학살에 쓰여지게 된 것에는 능력주의를 요구받는 부품적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의 망각과, 벌레와 인간마저 혼동하게끔 만드는 생산주의라는 비뚤어진 근대의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무서운 ‘주술’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내셔널리즘의 마술‘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마술’ 인지 술하시오.

먼저 본인이 생각하는 ‘마술’은 ‘진짜가 아닌 기술로 현혹하여 하게끔 하는 것, 더불어 어떤 황홀경을 선사하는 것’ 에 가깝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서 ‘내셔널리즘의 마술’과 관련하여 강의에서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칠 수 있는 전쟁상황 같은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상상된 공동체간의 전쟁상황은 상정된 ‘국가’에 의해 내 옆에 있는 국적이 다른 친한 친구와 개인적인 관계를 뒤엎고 언제든 총구를 겨누는 사이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같은 국적의 타자와 하루아침에 전우가 되어 생사의 운명을 함께 수 있음 역시 지적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내셔널리즘에 굳이 마술이라는 형용을 가하여 수사하는 것은, ‘민족’이나 ‘국가’같은 관념이 마술의 구조와 같이, 사실은 만지거나 실제로 내가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애초에 선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짜 있는 것으로 파악되게끔 만드는 기술들이 있으며, 또한 그 과정이 마치 황홀경 같은 비일상적 효과를 가지기에 신앙적 힘을 행사함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국가 있음’의 현혹과 더불어 황홀경적 경험에 의해 ‘국가’를 위해서라면 가장 중요한 수많은 자신의 목숨도 내바칠 수 있는 기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의 안에서 내셔널리즘의 메커니즘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그때에 신문과 소설이라는 두가지 방법은 어떤 역할을 하고있다고 술하는지를 쓰시오.

앞선 문제에서 논술하였듯, 내셔널리즘의 매커니즘은 ‘마술’로 은유된다. 마술에서 현혹을 위한 기술이 필요하듯이, 내셔널리즘이라는 마술에는 신문이나 소설같은 기술로서 ‘공동체의 존재’를 ‘경험’시킨다. 여기서의 경험이란 직접 우리가 신체를 통해 직접 경험한다기 보다는 마치 경험된 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간접적인 경험 같은 것이다. 신문(NEWS PAPER)은 일자가 붙음으로써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신속히 소비하게 만든다. 화젯거리가 없어도 신문은 어김없이 매일 나온다. 다음날이 되면 그날의 NEWS는 또 다른 것으로 공급되기에 같은 시간대에 같은 언어로 공급되는 신문은 같은 소비거리를 제공함으로서 같은 정보를 공유하는 상상된 공동체, 즉 수많은 개개인을 ‘국민’이라는 공동체에 결부시킨다. 또 다른 하나의 매체 소설은 실제로 이야기 안에서 서로 안면식 없는 인물 A와 B를 독자가 신의 위치에서 모두 조망 가능한 구조이다. 그 둘이 서로 한번도 마주친 적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고 하여도 그 둘이 동시간, 같은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둘은 동시에 등장하고 파악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쉬이 접하거나, 혹은 세계에 태어남과 동시에 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우리는 동시대인과, 동사회인이라는 시간과 장으로서 규정되는 우리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게끔 현혹되기 쉽다. 신문과 소설은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나의 시간이 아닌 공동의 시간을, 나의 장이 아닌 공동의 장을 인쇄된 매체를 통해 보고 읽음으로써 경험하였다고 믿게 한다. 개인의 경험처럼 생경하지는 않으나, 머리 안에서 펼쳐지는 동시다발적인 경험이 황홀경으로써 경험되어 어쩌면 생경한 우리의 직접경험보다 상위에 그 경험되지 않은 경험을 위치시키며, 우리가 ‘국민’이라는 신앙심 깊은 종교집단을 만들어가는 기제로 작용시키는 것은 아닐까?

타마미술대학교 2018 후기에 개설된 <문화인류학>논제들로부터

なぜかいつも批判は易しい。批判の素材を見つけるのも簡単で,それに対して吐き出す言葉も簡単である。しかし、そのように常に試みられる批判の中に針のように,常に批判の対象は私たちの生を反芻しており、批判の矢のいくつかは,必ず私にも戻ってくる。そうした脈絡で「絶対悪」と表象されたナチス政権の大量虐殺は長い間批判の対象でもあったが、私たちの生の標本のようなものでもあった。残酷で非理性的だったその簡単な批判の素材は、ごく一般的で「悪」とは見えない平凡だったことの段階を踏んで行われた。到来した近代化による経済成長と国家の復興、そしてそれによって平均的に上向きになった生活の質を保障される全体的「大衆」、それは合理主義を根幹として「生産性」を大きな価値に置き、それによって仕事の分業化が自然に広がり、「職務」に忠実に答える誠実な人材像がいつにもまして重要であったのである。もちろん、ヒトラーの理想は一般的な近代化とはその路線を異にしたが、その時の自然な主流的な指向性と、ユートピア的な世界像に対する欲望は、ナチス政権の下の大量虐殺にも関与したかも知れない。大量虐殺はまるで大量生産の反対語のように「大量沒生産」のように扱われた。収容所の「大衆」はナンバーリングされ、その人間的な個人を喪失し、私物化して管理されており、収容所は分けられた「職務」による専門家により効率の良い役割ができるように「計算」して設計された。専門家たちは、専門により特化された能力を得る代わりに、全体を理解しようとする試みは彼らに不必要なものになり、職務にのみ完全に「忠実に」答えればよい部品的な存在になった。殺虫剤として開発されたチクロンBがガス室で人間の大量虐殺に使われるようになったことには能力主義を要求される部品的な存在になってしまった人間の忘却と、虫と人間さえ混同させる生産主義という歪んだ近代のユートピアを指向した恐ろしい「呪術」が作用し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まず、本人が考える「魔術」は「本当ではない技術で眩惑させ 眩惑て信じるようにすること、加えてある恍惚境を与えること」に近い。ベネディクト・アンダーソンの『想像の共同体』で「ナショナリズムの魔術」と関連して講義では、国のために自分の命さえ捧げることができる戦争の状況のようなものについて話した。想像された共同体間の戦争状況は想定された「国家」によって私の隣にある国籍が違う親しい友人との個人的な関係を覆し、いつでも銃口を向ける関係になることができたり、同時に一言も交わしたことのない、同じ国籍の他人と一瞬に戦友になって生死の運命を一緒にすることができることも指摘する。ベネディクト・アンダーソンがナショナリズムにあえて「魔術」という形容を加え修辞するのは、「民族」や「国家」のような観念が魔術の構造のように、実は触れたり、実際に本人が認識できないもので、想像力を動員したり、創り出すしかない、そもそも先在するものではないにもかかわらず、それが本当にあるものとして把握されるようにする技術があり、また、その過程がまるで恍惚境(エクスタシー)のような非日常的な効果を持つため信仰的な力を行使することを示唆することではないだろうか。そのように我々は「国家 有り」の誘惑に加え恍惚境的な経験によって「国家」のためなら、最も重要な数多くの自分の命も捧げることができる不思議な状況に直面することになる。

前の問題で論述したように,ナショナリズムのメカニズムは"魔術"として隠喩される。魔術では幻惑のための技術が必要なように、ナショナリズムという魔術には新聞や小説のような技術として「共同体の存在」を「経験」させる。ここでの経験とは、直接、私たちが身体を通じて経験するより、まるで経験者の話をの聞くような間接的な経験である。新聞(NEWS PAPER)は日字が付くことによって、毎日毎日新しいものを迅速に消費するようにする。話題の素材がなくても新聞は間違いなく毎日出てくる。翌日になるとNEWSはまた別のものに供給されて、同じ時間に同じ言語で供給される新聞は同じ消費の素材を提供することで、同じ情報を共有する想像された共同体、すなわち多くの個々の人を「国民」という共同体に結び付ける。また、他の一つのメディアである小説は,実際に物語の中で、互いに一面識もない人物AとBを、読者が神の位置から眺望できる構造である。その二人がお互いに一度も会ったことも、話をしたこともないとしても、その二人が同時間、同じ社会に存在するということだけで、その二人は同時に登場して、把握することができる。このようなことを簡単に接したり、あるいは世界に生まれるのと同時に接する運命である私たちは、同時代人と、同社会人という時間と場として規定される私たちの共同体をしっかりとするように惑わされやすい。 新聞と小説は私が経験できない私の時間ではない共同の時間を、,私の場ではなく共同の場を、印刷された媒体を通じて見たり読んだりすることで経験したと信じさせる。個人の経験のように生硬ではないが、頭の中で繰り広げられる同時多発的な経験が恍惚境として経験され、恐らく生硬な私たちの直接経験より、上位にその経験されない経験を位置付けて、私たちが「国民」という信仰心の深い宗教集団を作っていく機制として作用させ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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