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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동시대의 군주 이미지여! :지시받은 이미지가 실재인 우리의 자유를 지배한다.2 (유예된 언어, 유예된 죽음)


원문과 번역 먼저 증언집은 증언당사자가 아닌 증언을 기록하고자 하는 집단에 의해 취록된 문서이다. 여기서 이미 사실의 발생으로 부터 이미 두 단계를 거쳐왔다.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당사자가 그것을 회상하여 언어로 골라 입으로 부터 발화시키는 순간에 한번 재현되었고, 증언을 기록하고자 하는 집단이 그것을 엮어 기록화 할때에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한번 다양한 다수가 모여 각기 번역한다. 원문은 다양하게 재현된다. 파생되는 증언들. 전복하는 증언들. 혁명하는 증언들. 그렇다고 그것에 위계가 있는가? 아니다. 번역문이 더욱 그 기의를 순수하게 전달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원문을 넘어서는 번역이다. 여기서 권력관계는 무너진다. 20세기가 가져온 ‘시뮬라시옹‘의 연금술, 파생실재가 실재를 전복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파생실재가 실재를 잡아먹을수도 있는 불확정성의 실재에서 어떠한 것을 신의해야 하는가. 원문일까? 번역일까? 증언자일까?

타자의 아픔_목격되는 아픔 태풍이 지나갔다. 어제까지의 풍경 역시 지나갔다. 공원에서는 풀들이 비명횡사 하며 내는 피비린내가 습하게 넘실되며 코로부터 몸까지 눅눅히 칠해냈다. 몇몇 고목들도 관절이 다 꺽여버린 아름다우면서 괴기한 죽음을 맞이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침범해왔다. 나는 타자의 고통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가. 나의 욕구, 사회의 구성원 혹은 작가로서 지는 도의적인 책임감, 그렇기에 알아야 한다는 욕망. 그 욕망과 상관 없이 나는 그것에 얼마나 접근 가능한 것인가. 역겹게도 절실히 타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음을 직감했다. 곧장 나는 나의 집으로부터 카메라를 챙겨 들고 그 사건현장을 재차 방문하여그 잔혹한 현장들을 마구잡이로 찍어 담는다. 영락없는 목격자의 꼴이다. 아니면 폴리스라인을 만들고는 일을 처리하는 경찰관의 모습이거나. 그렇게 나는 또 A4용지 한 팩을 포장된 채로 집어들고는 나와 흙바닥에 마음대로 널려서 식어가는 나무들에 대고는 본을 뜬다. 그게 나무의 아픔을 느끼고자 한다거나 그런 기가 차는 논리라면 작품은 아주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지시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피해자의 감성을 가지고 흔들어대듯이. 그러나 내가 나무를 A4규격의 프린트용 종이에 빠르게 여러장을 옮겨내며 느끼는 것은 이곳의 안쪽은 벌레때문인지 무엇때문인지 썩어들어가 비어있었기에 그 지난 사건당일에 격동의 바람을 제대로 맞아보지 못하고 부러져야 했겠구나 라던지, 이곳에 달린 거미줄이나 작고 유약해 보이는 생물들은 잘도 살아남아 여전히 산송장위를 줄지어 기어다니고 있는데, 단단하게 자기를 쌓아올라온 고목은 일회용 나무젓가락 마냥 쉽게 꺾였구나 라던지정도 등이다. 그렇게 파생한 나무들에 대고 그래서 이 행위가 너의 죽음의 진행에 무슨 의미이겠냐고 묻는다.

유예되는 언어와 유예되는 죽음 원문 없는 복제들이, 유령처럼 모호한 이미지로, 잡히지 않는 이미지로 전시장을 떠돈다. 그렇게 유령들이 현생에서 떠나지 못하고 모호하게 떠돌듯이, 복제들 역시 떠돌며 그 존재를 유예시킨다. 그 존재의 파악을 유예시킨다. 원문은 권력을 가진다. 원문이라는 이유로 그것과 결부되어 헤게모니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제들은? 오히려 그런 쉬이 주어지는 권력으로부터 구속받지 않는다. 유령이 사회에 구속받지 않듯이. 그렇게 복제들은 어디까지고 룰의 구속으로부터 유예된다. 나는 공동의 번역을 통해 유예되는 언어들, 그리고 증언들의 유예들을 느낄 수 있었다. 증언은 두가지 의미로 유예되는데,

1. 증언의 해석들을 유예시킨다. 2. 증언의 발화, 즉 목소리와 함께 살아지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그 발화가 유예되는 것이다. 증언의 재발화이다. 태풍과 같이 찾아온 그 괴기한 사건현장도 유예된다. 그렇게 복제되는 것으로. 파생의 파생의 파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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