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in yeowool
동시대의 군주 이미지여! :지시받은 이미지가 실재인 우리의 자유를 지배한다.
이미지, 상징, 폭력. 이미지, 상징과 같은것은 아주 미세하고 부드럽게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권력의 구조를 이분시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로 파악해 본다면, 흔히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여러가지 형식으로 억압한다. 그 형식들에는 그 억압의 양태가 가시화되어 있는 경우도 많지만, 비가시화 된 형태로 지배하는 경우도 많다. 비가시화 된 지배형태는 보이지 않기에 그것이 억압이라고 인지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그것의 증언 불가능성(설명하기 난해해짐) 등으로 지배 혹은 억압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기 쉽다. 그리하여 지배층은 일말의 책임소재를 저 멀리 안전지대에 밀어 둔 채로 부드러운 지배(혹은 봉기없는 지배)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 편재, 산재하여 있다. 가장 보기 쉬운 예로 대중매체를 들 수 있다. 미디어는 잘 알려져있듯, 그 본래 기능이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우리의 세계를 구축하는 힘으로 오랫동안 작용해 왔다. 더 세밀한 예시를 보자. 최근 본인이 이미지 폭력의 표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위안부 소녀상‘이다. 의아할수도 있다. ‘위안부 소녀상’은 구조의 하위층, 즉 가장 억압당해 온 약자를 표상하는 동상이 아닌가? 나는 그러나 이것을 더욱 심화된 이미지 폭력, 즉 이중으로 코딩된 이미지 폭력으로 보고있다. 먼저 ‘위안부 소녀상’ 은 ‘세계적 피해자’의 이미지를 가진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잔혹한 지배층에의 저항과 반감을 촉발시킨다. 먼저 이 거대 코드로 일차적인 폭력이 들어간다. ‘위안부 소녀상’은 ‘피해자=피지배층=절대선‘과 같은 전이들을 거친다. 그리하여 ‘피해자=절대선’의 공식도 가능하게 만들며, 반대로 ‘지배층=절대악‘이라는 오역도 가능해지게끔 혼란시킨다. 이것은 ‘위안부 소녀상’의 이미지를 동반하여 행해지는 비논리적 행위, 언행등을 정당화 시키는 것에 충분히 이용 될 수 있다. 그리고 지배층이 행하는 논리적 행위나 사고들이 피지배층의 대립구조에서 안티테제로 변이되어 이유없이 묵살당하거나 무시될 수있다. 이것이 이미지가 가지는 권력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코딩된 폭력, ‘위안부 소녀상’=‘피해자’ 공식의 성립이다. 위안부 소녀상은 비교적 직접적인 상징들을 채택하고 있다.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교복같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맨발로 의자에 앉아 울고 있다. 나의 리서치에 의하면, 위안부 소녀상과 닮지 않은 모습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들이 잔혹하게 피해의 장에 놓여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여러층의 권력 구조 안에서 최하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본-식민지-조선-가난한 가정-여성-차녀 등과 같이 구조의 구조를 거듭하여 억압의 억압을 당해온 것이다. 구조적으로도 거듭의 거듭을 거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피해자의 모습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위안부 소녀상이 지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소녀이며, 누군가는 20살이 넘은 여성이었다. 또 누군가는 일본군의 군홧발에 짓밟히며 끌려갔으며, 누군가는 양부모에 의해 팔려나갔으며, 누군가는 간사한 동네이장에 꾀에 속아 넘어갔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일본군을, 누군가는 일본군보다도 자신의 부모를, 누군가는 조국을 제일 용서할 수 없다 얘기한다. 그러나 ‘위안부 소녀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아직 몇개 열거하지 않은 모습들 중 누구를 떠올리라 지시하는가? 이미지는 이렇게 부드러운 폭력으로 우리에게 선전포고도 없이 조용하게 다가오기에 우리는 그대로 새로운 식민구조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몇가지만 생각해보자 더욱 생각이 힘을 가질 것이다. 1. ‘위안부 소녀상’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2. ‘위안부 소녀상’의 모습은 아무리 상징이라고 할 지라도, 그 목적에 부합하는가? 3. ‘위안부 소녀상’은 어떠한 장소에 설치되는가? 4. ‘위안부 소녀상’을 만드는 주체는 무엇인가? 이정도의 답만 하더라도, 질문과 의구심은 끊임없이 물고 늘어져 나올것이다.
미술관에 대하여 앞서서 나는 이미지의 부드러운 폭력에 대하여 얘기 하였다. 여기서 나는 가장 큰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작가로서 불특정한 관객에게 작품을 노출시키는 사람이다. 작품은 관객이 원하지 않아도 관객의 눈에 노출된다(물론 현대 예술은 미디어의 발전에 따른 응축된 시간의 작품들의 산재로 관객이 선택하여 관람함으로서 그 일방향성이 많이 붕괴 되었다고는 하나…). 그리하여 나는 설령 의도하지 않더라도 관객에게 많은 지시를 할 수 있다. 그것이 수용되느냐 안되느냐 그것은 관객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무책임한 사고는 미디어의 병폐를 시청자에게 모두 돌리는 것과 같다. 나는 오히려 직접 내가 언행함으로서 그들을 직접 설득하거나 회유하는 것보다도 깊은 상징의 힘으로 관객에게 부드러운 지시를, 반발할 생각하지 못하는 지배를 행할 수도 있다. 그것은 ‘미술관’이라는 장이 가진 권력과 합치된다. 그렇기에 나는 작가에게 주어진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심해야 할 것이다. 그 권력을 최대로 배제해야 할지, 혹은 어느정도 그것의 구조를 이용하여 관객의 상상을 유도할지, 그 균형을 결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