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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H에게J로부터


H.

H 건강히 잘 지내? 나는 여전히 행복과 고통을 반복 하는 순환적 삶을 영유하고 있어. 요즘 나는 교양 강의로 ‘문화인류학’이라는 강의를 듣는 중인데, 레포트로 지인에게 강의 중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하여 전달하는 특이한 형식의 과제가 주어졌어. 이걸 기회로 너한테 늦은 답장을 쓸까해. ‘회신’이라는 행복한 임무를 완수하는 것도 있지만, 너라면 내가 관심가진 이 부분에 대해서 또 재미있는 생각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수업에서 대체로 다뤘던 주제는 ‘사실’과 관한 것들 이었어. ‘사실’이라니 막연하지? 강의의 맥락에서는 다양한 아젠다와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너와 내가 공통적으로 가장 취약한 요약, 정리하는 것! 그것은 굳이 하지 않을게. 몇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파생될 수많은 주름 같은 대화들이 생성될테고 그것만으로 편지의 나이는 충분히 많아질 것 같아.

강의 중 ‘현,재의 배후에 있는 역사’라는 큰 맥락 안에서 2차세계대전시 일본의 피폭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겪어낸 고통에 대해 탐색하고 연극화 시키는 이노우에 히사시라는 사람의 얘기가 일부 나와. 나는 사실, 불과 몇 년전까지만해도 내 안에 습득 된 내셔널리즘과 피해자의식으로 일본의 패전과 그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고통을 ‘악에 대한 응징’으로서 생각했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정말이지 그런 비인간적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런 비인간적 해석으로부터 벗어난 뒤에도 그러나 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기회는 많지 않았어. 이번 강의에서 <이노우에 히사시: 피폭을 다루는 것> 이라는 피폭에 대한 한 극작가의 지대한 관심과 리서치를 담은 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는데, 그건 내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리 저리 정보와 사실들을 파악하려고 고군분투했던 그 모습과 닮아 있다고 느껴서 괜히 더 과거의 무지의 나를 질책하는 시간이 되었어. 인간의 고통 앞에 나는 아직도 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성을 투사하려하고 또 아직도 그 도그마적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관조하는 구나 싶어서, 나는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탐독하던 중에 증언집을 끝으로 어떤 다른 기록들이나 정치적 상황 등은 더 이상 찾아보지 않게 되었어. 증언집은 그야말로 나한테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는데, 물론 내용이 자극적이라면 자극적일 수 도 있어. 픽션같이 느껴지는 말도 안되는 일과, 수사불가능한 비참한 상황들. 근데 나에게 그것이 큰 충격이 된 것은 내가 지금껏 많은 자료로부터 ‘사실관계’를 이해하려했고 그래서 피해자를 규정하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증언집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피해자’로의 일본군‘위안부’일반을 상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고통을 겪었던 ‘위안부’할머니들 한명 한명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 순간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는 점이야. 이노우에 히사시도 피폭자들의 증언집에서 부분 부분을 본인의 수첩에 빼곡하게 수기로 적어 내려가. 그가 극작가이기에 연극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명히 증언집이라는 형식의 정보는 중요 했을거야. 근데 그 이전에 연극이라는 재현물을 만드는 데 있어 그는 증언집을 통해 그들의 고통에 보다 깊숙이 소급하여 고유고유 인간들과 조응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강의 내에서는 대문자의 History와 그 배후에 있는 수많은 histories에 대하여 이야기해. 우리가 알고 있던 거대역사와 다르게 숨겨진 타자들의 역사에 관하여...근데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이후 타자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흔해져버렸고, 이제는 오히려 우리가 타자를 소비하는 방법에서 많은 병폐가 유발되는 듯해. 다시금 histories에도 정치성이 개입하기 시작하고 모순적이게도 histories라는 복수형 명사에 단일한 이미지를 주입하려 해. histories의 주체는 구조적으로 타자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다시 한 번 소외시키지 않는 일은 그들은 고유한 인간 한명 한명으로 이해하는 일이겠지? 그러니까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 필연적으로 제기된 이 타자에 대한 관심이 세계의 담론, 메인 스트림에 편승하여 다시 한 번 History가 범한 거대서사의 맥락으로 환원되지 않기를 나는 마음깊이 바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근의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내셔널리즘적 태도와 피해자주의적 태도에 회의감이 들어. 할머니들은 정말 가지각색의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 아픔을 치유하거나 세상을 용서하는 방식도 다 달라. ‘위안부 소녀 상’과 같은 하나의 이미지가 정말로 그녀들을 다 대변할 수 있을까? 문제는 History와 histories에 다시 한 번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닌 이제는 ‘진정한 사실’의 영역을 탐험하기 위해 월경해야 할 때 아닐까?

경계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지. 나야 일본이라는 이웃나라에 와 한국과 시차도 없는 곳에서 비교적 잘 적응하며 살고 있지만, 브루클린은 너무너무 먼 곳처럼 느껴져. 가끔 너와 초콜릿 퍼먹으면서 와인마시면서 끊임없이 파생되어 나아가는 이야기가 그리울 때 더욱! 가끔 내가 사는 이곳이 외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지영, 항상 월경하여 널 응원하고 지지해. 유동하는 시민, 우리의 존재 파이팅!!

도쿄로부터 뉴욕으로 J,

H。

H〜元気に過ごしてる?私はあいかわらず幸せと痛みを繰り返す循環的生活を領有しているよ。最近私は教養の講義で「文化人類学」という講義を聞いているけど、レポートに知人に講義中に印象深かった部分について伝達する特異な形式の課題が与えられていって。これを機会としてあなたに遅い返事を書こうかと思って。 「返信」という幸せな任務を果たすこともあるが、あなたなら私が興味を持ったこの部分について、また面白い思いをしてくれるとおもっているから…

この授業で大体、扱ったテーマは「事実」と関連したことだったよ。 「事実」って漠然としてるね?講義の文脈では、様々なアジェンダと様々な情報があふれ出てきたが、あなたと私が共通的に最も脆弱な要約、整理すること!それあえてしないね。いくつかの節だけで、私たちは、派生される数多くのしわのような対話が生成されると思うしそれだけで手紙の年齢は十分に多くなると思う。

講義の中で「現-在の背後にある歴史」という大きな文脈の中で第二次世界大戦時の日本の被爆者とその家族が経験した苦痛について探索し演劇化させる井上ひさしという人の話が何回か出てくる。私は実際には、ほんの数年前までは、私の中に習得されたナショナリズムと被害者意識で日本の敗戦とそしてそれに関する彼らの痛みを「悪の報復」として考えていたことを認めざるを得ない。本当にそんな非人間的考えをしていたから。そんな非人間的な解析から切り抜けた後も、しかし、彼らの苦痛に関心を持つ機会は多くなかった。今学期の講義では、「井上ひさし:被爆を語ること」(タイトルが合ってるか覚えてない...)という被爆についての一人の劇作家の大きな関心とリサーチを入れたドキュメンタリーを見たけど、それは私が日本軍「慰安婦」問題に関心を持つようになり、あちこちの情報と事実を把握しようとしながら苦労していたその姿と似ていると感じて余計、過去の無知の私を叱責する時間になったの。人間の苦しみの前に私はまだ多くのイデオロギーと政治性を投影しようとし、また、まだそのドグマ的慣性を捨てられず、世界を熟視するんだと思って、私は日本軍「慰安婦」に関する多くの情報を耽読した中に証言集を最後としてある他の記録や政治状況などはもはや探してみなくなったの。証言集は、まさに私にとても破格のものだったが、もちろん内容が刺激であれば、刺激であることがもありけど。フィクションのように感じられるナンセンスルーチン、修辞不可能な悲惨な状況…ところで、私にはそれが大きな衝撃になった最も重要な点は、私は今まで多くの資料から「事実関係」を理解しようとしたし、被害者を規定しようとしていたこととは違って、証言集を読み下がる瞬間「被害者」としての日本軍「慰安婦」一般を想定するのではなく、苦痛を経験した「慰安婦」ハルモニ(おばあさん)たち一人一人を理解し、心に惜しんで痛みの瞬間に自然に転移された点のことだ。井上ひさしも被爆者の証言集から部分部分を本人の手帳にぎっしりと手書きで書きのこしておる。彼が劇作家だから演劇を作り出すために、明らかに証言集という形式の情報は、重要だろう。ところで、その前に演劇という再現物を作成するために、彼は証言集を通じて、彼らの痛みにも奥深く遡及して固有な人間一人一人と照応しようとしたいなかったのだろう?とにかく、このような文脈での講義内では、大文字のHistoryとその背後にある複数のhistoriesに対して話してた。私たちが知っていた巨大歴史とは異なる隠された打 他者の歴史について...ところでポストモダニズムの談論の後、他者の話はあまりにもありふれってしまい、今はむしろ私たちが他者を消費する方法で多くの病弊が誘発されるようで…再びhistoriesも政治性が介入し始め、矛盾的にもhistoriesという複数形名詞に単一のイメージを注入しようとする動きが見えちゃう。 historiesの主体は、構造的に他者になるしかなかったが、かれらを再び疎外させないことは、彼ら固有の人間一人一人に理解することだろう?だから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時代に必然的に提起されたこの他者への関心が世界の談論、メインストリームに便乗して、再びHistoryが犯した巨大叙事の脈略に還元されないことを私は心の深く願っている。その意味で、私は最近の韓国の日本軍「慰安婦」問題を接するナショナリズム的な態度と被害者主義的な態度に懐疑感を感じる。おばあちゃん達は、本当に多種多様な痛みを持っていて、その痛みを治癒したり、世界を許す方法もすべて違う。 「慰安婦少女像」などの1つのイメージが本当に彼女たちをすべて代弁することができるか?問題は、Historyとhistoriesに再び境界を設定するのではなく、今からは「真の事実」の領域を探索するために、越境すべきときではないか?

境界というのは、私たちが今直面下げている問題と結びついているね。それは私は、日本という隣国に来て韓国と時差もないところで、比較的よく適応し住んでいるが、ブルックリンはあまりにも遠くように感じられる。たまにあなたとチョコレートをやたらに食べながら、ワインを飲みながら、常に派生されていく話のことが懐かしくなったとき、さらに!時々私の住む場所が寂しくしたりもするが、ジヨン、常に越境してあなたを応援して支持する。流動する市民、私たちの存在頑張ろう!!

東京からニューヨーク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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