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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flesh_ 살, 고기, 피부, 과육 ___ anti-myth


narrative_서사:

점의복제

엄마와 내가 가진 배에 있는 특이한 점. 최대직경 10cm 정도의 구름같은 모양의 큰 모반 위에, 작은 무수한 점들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살(flesh) 위에 새겨져 있는 이 특유의 모반은 아마도 잉태 시 모체에서 나에게로 유전적인 형질을 가지고 이식되었다. 잉태와 출산의 과정에서 모체의 점은 태아에 복제술의 과정을 거쳐 마치 기계와도 같이 똑같은 점을 생산해 내었던 것이다. 인간과 기계를 양 극단에 놓기를 반복해오는 에피스테메에 의해 보자면 점의 복제라는 말은 잘 안어울릴지 모르겠다. 오히려 복제보다는 자연과 인간 몸의 숭고함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든 엄마와 나의 배에 복제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점의변곡

어릴적에는, 아니 더욱 명료히는 사춘기를 지나오면서 까지도 나는 그 점이 창피했던 것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유치원에서 단체로 수영장을 갔을 때에 엄마는 나에게 투피스의 비키니수영복을 입혀 보냈었는데, 나는 비키니의 상의를 끌어내릴수 있는데까지 끌어내려 배꼽 근처를 가리려고 했었다. 6살 정도의 나에게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젖꼭지보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은 그 특별한 점이 가릴 부분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내 눈에는 다른 사람들은 가지지 않은 특별난 것이었다. 그 특별함을 창피스럽게 여기는 심리적 기제는 어디로부터 작용되어 온 것인가?

먼저는 메이저와 마이너의 문제. 여기에서 또 두가지 문제가 파생된다.

_자기와 타자

_소속감과 소외감

첫번째 자기와 타자의 문제는 몸이라는 전 인류의 공통된 물질위에 점이라는 나 개인 특유의 점으로서 서서히 부상된다. 여기에는 동질감과 차이를 같이 일으키는 요소의 동시존재로 나와 타자의 구분을 더욱 명료히 한다. 공통의 몸의 존재로 종의 동일함은 인지된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어류의 혹은 파충류의 몸을 쉽게 비교하고 다름을 찾으려하지 않듯이, 오히려 같은 종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차이는 더욱 그 차이의 발현에 대해 궁금함과 관음증적 감각을 자극한다. 따라서 점의 물질성, 그리고 그 에너지는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비교의 영역으로 견인한다.

견인하면 이것이 두번째 소속감과 소외감의 문제이다. 구별된 자기와 타자는 비교에 의해 단지 다름의 영역에 정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정과 비-인정의 문제로 탈선해 나간다. 이 영역과 탈영역의 문제에 의해 나의 어린자아는 그 점을 영역에로 복귀시키고자하는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부정해왔다.

지금. 점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인생에 있어 획기적이며, 가장 현란하고 유동적이었던 시간에 그 점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점은 이렇게 유아기와 사춘기를 거쳐 왔다.

점의무화

_점과 별자리 (점과 신화)

이런 점으로부터 나는 왠지 모르게 별자리를 생각해내었다. 물론 그것이 점의 모양이기에 일상에서 자주 보는 밤하늘의 별의 은유로서 직관될 수 있다는 것은 부정치 않는다.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별의 깊숙한 자리에 파고들어보면 별의 탄생처럼 뜨거운 열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별자리는 신화로부터 기인한다. 우주의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름다움. 그 잠재태에 우리네 신화들은 자신들을 투사한다. 그럼으로써 인정의 영역에, 존재의 영역에, 믿음의 영역에 편입하려 한다. 물론 신화가 그냥 픽션들과 구분되어 거듭해오는 우리의 시대들에 교훈적이며 각성적인 역할을 도맡아 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교훈적 힘이 때로는 교조적 헤게모니로 변환될 때 그 위험이 있다. 신화는 탈신화의 영역으로 탈주할 때에야 비로소 신화의 영역에 곧추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몸의 영역 역시 그렇다. 살, 점, 기관 이런 것은 어찌되어도 좋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나의 실존을 오롯이 느낄 때는 오히려 병약해졌거나, 고통이 도래했을 때이다. 신체의 탈신체화로부터 신체가 출산된다.

_점과 모성

또 하나는 엄마와 나의 문제이다. 위에서 복제라는 말로 언급했듯이, 엄마와 나는 동일표식을 가지고 있다. 유전적 형질에 의해 발현 되었을 이 동일한 점에서 나는 근대적 주체의 죽음을 떠올렸다. 보통 근대적 주체의 죽음의 표상(메타포)으로 인식되어지는 태아. 즉 한 인간의 자궁이라는 공간에 아기집이 생기고 태아라는 생명체가 존재되며 몸의 주체가 붕괴되는 순간. 그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숭고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당연하게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함을 경험할 것이다. 지금의 보편적 시각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아이를 출산해내는 고통을 어렴풋이 떠올려왔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엄마가 되어버린 친구들에게 가끔씩 출산의 고통의 생경한 과정을 들을 때면, 호기심과 아름다움과 무서움이 함께 존재한다. 또한 생각해보라, (물론 계획적인 임신이 많겠으나, 신체적으로는) 갑자기 한순간에 자궁 안에 기생하는 생명체가 생기고 그 생명체에 의해 숙주가 되어버린 느낌. 그리고 그 생명체를 몸 밖으로 낳아내는 뜯겨져나가는 고통! 그런데도 불구하고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형용으로 점철되어 강요되는 모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폭력적인 시각이지는 않은가? 남성적 시각으로 잉태와 모성을 숙명적으로 호도하기에는 잉태라는 사건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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