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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서사


관계의 요소

관계성이란 무엇인가? 관계를 맺는 성질, 관계는 어떻게 맺어지는 것인가? 적어도 두 묶음의 요소는 필요하다. 굳이 나누어 보자면, ‘나와 너의 관계’처럼 주체(主體)와 타자(他者)라는 두 묶음은 필수적이다.

존재의 형식

실존주의에서는 이 주체와 타자간의 위계가 있었고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면, 구조주의에서는‘주체는 죽었다.’고 하며 오히려 타자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나’라는 인본주의적 개념이 아니라면 후자 역시 주체는 존재한다. 개념의 중심, 사상의 시발점 혹은 현상의 장으로써의 主는 분명 존재하고, 그 밖의 매개되거나 매개되지 않는 그 무엇들은 他일 것이다. 그렇다. 어찌 보면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닌 ‘주체는 죽었다.’라는 말은 굉장히 엄밀하고 정확한 표현이었다. 죽었다는 것은 존재까지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체와 타자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과 위계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에서의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더니즘의 비판적 성찰로써 도래했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가 그 기존의 토대를 역전시키는 획기적인 사상을 가짐에도, 그 파격성에 걸맞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고 지적했고, 한낱 유행처럼 21세기에 들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종언을 고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냉전의 종식과 함께 글로벌리즘된 사회에서 그들이 말한대로 복제된 파생실재는 실재를 전복하고, 다원화 되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강조했던 그 ‘차이’들은 오히려 큰 차이의 아노미 속으로 몰아넣었고, 실재계를 사막화 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사회적 역할을 다 못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겐 그래서 수행해야할 일들이 남아있다. 모더니즘의 비판적 성찰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관계의 방향은 무엇일까? 결국 포스트 모더니즘이 제시하지 못한 모더니즘에 대한 그 해답은 무엇일까?

관계의 서사적 한계

자본주의라는 큰 파도에 실려 온 모더니즘이라는 큰 배는 지금의 21세기를 구축하는 골조들을 실어왔다. 모더니즘에서의 관계라는 것은 큰 구조였다. 자본, 학문, 예술, 정치 모든 것이 위계화 되어있고 그런 거대서사(위계, 구조,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특징이었다. 거대서사의 의심, 타자, 차이 이것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했다. 모더니즘의 동일성을 비판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부터 포착되지 않은 현상들, 기존의 권력관계로부터 억압되어 있는 것들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안티테제적 성격이 강해서, 모더니즘의 특성 밖이 아닌 모더니즘의 범주 바깥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모더니즘이 송두리째 의심받고, 모더니즘이 범했던, 거대서사의 조직을 다시 한번 꾀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원성이 이시대의 가치축으로!

차이가 부른 아노미

그렇게 다원성, 개성, 차이 등이 가치의 화두가 된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큰 현상은 암과, 클론같은 것이다, 다양한 가치의 서술이 무분별하고 무경계함은 동일자의 무한증식과 같은 것으로 사실은 그들 간에서 존재가 떠오르기보다, 그에 의한 아노미로 밀어 넣는다. 암에 의해 생명적 존재가 위협받듯이. 예술역시 예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죽은 것이 아닌, 무한증식의 과잉에 의한 아노미 현상으로부터 죽은 것이다.

실재의 사막

20세기를 지나며 모더니즘이 테제로서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안티테제로 분절된 대립각을 지니고 있을 때 그 차이의 경계는 들뢰즈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가 지녀야 할 방향을 잉태해내고 있다. 사실은 ‘존재’는 대립된 두 것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그 차이가 발현되는 사이에서 비집고 새어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끊임없이 내파(implosion)하고 있는 사막화되고 황폐화된 실재계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공동체, 유대감, 연대담론과 같은 것들은 자칫 모더니즘으로의 회귀로 느껴질 수 도 있으나 근대사회에의 관계개념과 글로벌리즘사회에서의 관계개념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우리가 실재의 사막에 차이로부터 잉태해내어야 할 생명수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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