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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아픔에 따르는 예술의 혼(痛みによる芸術の魂)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기점으로 국제 사회는 냉전시기를 맞이하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련체제 붕괴와 같은 큰 상징적 사건을 맞이하여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글로벌리즘 사회의 가치 축으로 작용하기 전까지, 양 극의 이념은 팽팽하게, 그러나 이전의 열전과는 달리 내향적으로 폭발적이고 긴장감이 응축되어 있었다. 냉전이라는 이름 아래, 그 해결되지 않은 채 응고된 아픔이 내재되어있는 땅에서, 예술가들은 그 누구보다 응고된 아픔의 땅을 향해 뜨거운 열을 분출하며, 평화와 자유를 갈망했다. 그 중에서도 더욱 정제되어 있고 억압하던 동 측은, 자유롭게 표현해야 할 예술가들을 구속과 속박함으로써 더 큰 자유에의 갈망과, 슬픔, 아픔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비록 냉전시대의 이전이기는 하나, 단 시크 바에르 <홍색의 가을>이나 미카일 쿠르진의 <자본가>, 루이센코의 <소> 등, 스탈린에 의해 억압당했던 아방가르드 회화를 보면,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예술가들이 얼마나 속박의 고달픈 삶을 영유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하였는지 느낄 수 있다. 동 측의 예술가들은 서 측과는 다른 형식으로 자유를 갈망하기도 하고, 혹은 본인이 살던 대지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영역에서 그 아픔을 표현하고 투쟁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서 측의 <신표현주의>의 맥락 아래, 독일 미술가들은 자국의 문화가 철저히 부정되어 버린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주제로 하기 위해서 20세기 초의 표현주의 기법을 답습하기도 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는 자유 없는 사회에 회의감을 느껴, 자유를 향해 동독에서 서독으로 옮겨간 뒤,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되자 너무 잘 그려지고 몸에 잘 익어 있는 것에 반감을 가졌고, 잘 그리기 어려운 상황을 본인에게 설정하기 위하여 일부러 상하가 거꾸로 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안젤름 키퍼 역시, 회화에 물감 외에 금속, 지푸라기, 머리카락, 콘크리트, 흙, 재 등의 물질을 재료로써 사용 하며 역사의 상처에 연금술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키퍼가 주로 다룬 주제는 독일나치즘과 유태의 역사를 담은 것으로 전쟁의 결과로 남은 황량한 폐허, 나치시대의 독일의 문화유산 등 대지가 내포하고 있는 상처를 비극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자신을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안에는 언제나 어둡고, 황량하며 짙은 암울함이 존재한다. 이렇듯 신표현주의 작품은 표면상으로 매우 단순하게 보일 수 있으나, 다양하며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구성, 구도에 있어서 전통적 기준을 거부하고 삶의 가치관을 반영하였으며 무언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으나 딱히 알아차릴 수 없는 애매모호함이 있다. 이상과 규범, 질서의 틀을 거부하고 자유스러운 개인의 상징체계를 구축하려고 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일리야 카바코프의 작품 역시 공산주의 규범 하에서의 일시적인 삶의 공간을 아파트 시리즈 작품으로서 내놓으며 설치미술이 예술가의 사상을 표현하는데 적절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관객이 아파트의 복도를 걸으며 공간에 직접 이입하여, 그 시대 혹은 상황의 암시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조금 다른 형식이기는 하나 코마르 앤 멜라미드의 제일 싫어하는 회화경향과 제일 선호하는 회화경향 같은 작품이나, 코끼리가 그린 그림 등의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작품은 마침내 자유를 얻은 그들이 더 이상 자유를 갈망하고 그런 것들이 주제가 될 수 없음으로부터 나오는 허무성, 즉 그들의 작품은 과거에 그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억압과 구속에 있었는지에 대한 큰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냉전시기가 끝나갈 쯤에 등장한 난민 문제, 걸프전쟁, 테러리즘 등, 냉전 종식 후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이끄는 세계화 시대의 한계와 문제에 대한 담론들도 대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념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보면 속박과 억압은 여러 개인들에게 역사의 비극을 상처로 가지게 만듦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폭발적인 예술의 혼을 펼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들이 겪어 온 역사의 비극이 예술로서 남아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답습하지 않아야 할 무엇인가를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늘 생각하게 되고,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투쟁 할 수 있다. 그것이 비극이 때로는 희극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一九四五年、第二次世界大戦の終了を起点として国際社会は、冷戦の時期を迎え、一九八九年、ベルリンの壁の崩壊と一九九一年、ソ連体制の崩壊のような大きな象徴的な事件を迎えて民主主義、自由主義がグローバリズム社会の価値軸として作用する前まで、両極の理念は強くぴんと、しかし、以前の熱戦とは違って、内向的に爆発的で緊張感が凝縮されていた。冷戦という名の下、その解決されないままの、凝固された痛みが内在されている土地で、芸術家たちは誰よりも凝固された痛みの土地に向かって熱を噴出しながら、平和と自由を渇望した。その中でもさらに精製されており、抑圧した東側は、自由に表現しなければならない芸術家を拘束と束縛することで、彼らがさらに自由への渇望と、悲しみ、痛みを持ちようにした。

たとえ冷戦時代の以前の作品ではあるが、Ural・Tansykbaevの<Crimson・Autumn>やMikhail・Kurzinの<Capital>、Yevgeny・Lysenkoの<The・Bull>など、スターリンによって抑圧されていたアバンギャルド絵画を見ると、社会主義体制での芸術家たちがどれほど束縛の苦しい人生を領有しながらも自由を渇望したのか感じられる。東側の芸術家らは西側とは異なる形式で自由を渇望したり、あるいは本人が住んでいた大地から離れ、自由の領域でその痛みを表現し、闘争したりもした。 その過程で西側の<新表現主義>の脈絡の下、ドイツ美術家たちは自国の文化が徹底的に否定されてしまった第2次世界大戦以降をテーマとするために20世紀初頭の表現主義技法を踏襲したりもした。 ゲオルク・バゼリッツは自由のない社会に懐疑の意を感じ、自由に向かって東ドイツから西ドイツに移った後、ついに自由を得ることになって、とてもよく描かれて体によく熟していることに反感を持っており、よく描き難い状況を本人に設定するためにわざわざ上下が逆になった絵を描いたりしていた。 アンゼルム・キーファーも、絵画に染料のほかに金属、藁、髪の毛、コンクリート、土、灰などの物質を材料として使用し、歴史の傷に錬金術的な意味を付与する。キーファーが主に扱ったテーマはドイツのナチズムとユダヤの歴史を盛り込んだことによって戦争の結果として残った荒涼とした廃墟、ナチス時代のドイツの文化遺産など大地が内包している傷を悲劇として持っている自分を描写する。それで彼の作品の中にはいつも暗く、荒涼とし、濃い暗鬱さが存在する。このように新表現主義の作品は、表面的には非常に単純に見えるかもしれないが、多様で、共通する特性を持っている。 構成、構図において、伝統的な基準を拒否し、人生の価値観を反映しており、何かのメッセージがあるように見えるが、特にそれを感知できない曖昧さがある。作品活動として理想と規範、秩序の枠組みを拒否し、自由な個人の象徴体系を構築しようとしたことである。ウクライナ出身のイリヤ・カバコフの作品も共産主義のルールの下での一時的な生活空間をマンションシリーズ作品として発売し、設置美術というものが芸術家の思想を表現するのに適切であることを見せた。観客がマンションの廊下を歩きながら空間に直接移入し、その時代あるいは状況の暗示に没入す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 また、少し異なる形式ではあるが、コマール・アンド・メラミッドの世界各地の一番嫌いな絵画の傾向と一番好む絵画の傾向のような作品や、象が描いた絵などの虚無なほどに簡単な作品は、ついに自由を得た彼らがこれ以上自由を渇望して、そのようなものがテーマとなる必要がないことから出てくる虚無性、すなわち彼らの作品は過去に彼らがどれ程、話もならない抑圧と拘束に押されていたかについての大きな反証でもある。

もちろん、冷戦時代は終わって行くごろに登場した難民問題、湾岸戦争、テロなど、冷戦終息後、民主主義、自由主義が率いる世界化時代の限界と問題に対する談論も台頭し始める。しかし、今も昔も、理念の是非の問題を離れて見ると束縛と抑圧は様々な個人たちに歴史の悲劇を傷口に持つようにすることと同時に逆説的に爆発的な芸術の魂を展開できる力を与えることもしているようである。彼らが経験してきた歴史の悲劇が芸術として残っていることで、現在を生きる我々は踏襲してはならない何かを知ることができ、 我々が志向すべき価値に対して常に考えるようになっており、それを守るため抵抗し、闘争することができる。それが悲劇が時には喜劇よりも 美しくて崇高な理由かもしれ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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