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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자유로부터 파생된 차이와 차별의 구조-여러 예술 작품을 통해 고찰하는 ‘진정한 자유로서의 차이’와 ‘과잉된 자유에 의한 차별’의 경계(自由から派生した差異と差別の構造-様々な芸術作品を


지금은 아니지만, 지난 몇 년간 극단적 채식주의자인 ‘비건’으로 살아왔었다.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보니, 그 전에는 느낄 수 없던 시선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의식하게 되는 본인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감각의 하나를 잃어 다른 감관들이 활성화시켜진 것과 같이, 악의 없는 타인의 본인에의 궁금증이나 감정들이 예민하게 느껴지고 불편했던 경험이 있다. 왜 마이너리티는 메이저리티를 이해시키거나 혹은 사회에 본인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메이저리티는 본인이 먹는 음식에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도 물어오지 않는다. 이 때에, 나는 그 누군가의 악의가 담기지 않거나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려는 시도에서 오는 궁금증 혹은 호의더라도, 혹은 그것이 비교적 가벼운 정도의 차이의 상정에 그치더라도, 차별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무한히 느꼈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더욱더 물리적으로 불편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가 있음에 차이 역시 존재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차이가 차별로 발현되는 순간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각각의 보장되어야 하는 자유와, 그리고 사회에서 그 자유성에 의한 월권 혹은 과잉이 차별로 이어지는 미묘한 경계는 어떻게 조정되어야 마땅할까, 그 미묘한 구조를 여러 예술 작품 등을 통해 판단해보면 좀 더 명료성을 띄게 될 지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2016>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일본인)에게 새로운 하녀(조선인)가 찾아오고, 아가씨의 부를 뺏기 위해 속이다 사랑에 빠져 되려 부를 뺏으려 모의했던 일당을 다시금 속이는 이야기이다. 언뜻 스토리만으로는 향락적 영화로 보일 수 있으나,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차별로부터 파생된 기형적 구조를 여러 층위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의해 발생된 종과 주의 관계가 일본인 아가씨와, 조선인 하녀로 표현되고 있다. 또 엄격한 보호를 받고 있는 아가씨는 사실 후견인에 의해 밀실에서 남성들에게 외설을 읽어주는 여성, 즉 남성들의 욕망을 담는 그릇으로서 살아오는데,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의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남성중심이자 차별이 만연하고 불평등했던 근대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녀는 아가씨에게 연민과 동정, 사랑을 느끼게 되고, 둘은 사랑(동성애)에 빠진다. 그렇게 그 둘은 종과 주의 관계로부터 탈피하고, 동성애라는 코드로서 차별로부터 파생된 구조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작년 아카데미상을 받은 Barry Jenkins 감독의 영화 <MOONLIGHT, 2016>역시, 한 약하고 작은 흑인 아이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푸르도록 치명적인 사랑과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많은 이야기들이 함축되어 있으나, 본인이 차별로서 주목한 부분은 ‘블랙’으로서 흑인청년이 본인이 스스로 성 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에, 약하고 괴롭힘 당하는 흑인 소년 ‘샤이론’이 또래 집단의 폭력성에 의해 섹슈얼리티가 규정 당하고 억압당하게 되는 부분이다, 왜 왜소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는 ‘게이’로 규정 될 수 있는가. 또 달빛아래에서 누구나 푸르게 반사되고, 그 달빛 아래 흑인 ‘샤이론’의 푸름을 반사하는 검은 피부에서 흑인사회의 지난함과 외로움도 엿볼 수 있다. 앞선 두 작품은 현재 우리 세대가 어느 정도의 차별과 자유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로서 작용한다.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담론화시키고 있는 것에서 가치의 축이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편견이나 선입견이 있을수록 늦게 보이게 되는 진실 같은 것처럼 더욱 더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들은 자명한 수준의 차별이 아닌, 경도수준의 차별들이다. <World War Z, 2013>를 필두로 한 할리우드 발 재난, 전쟁영화나, marvel사의 히어로 영화 같은 경우 빈번히 북한이나 이라크 등의 나라를 등장시킨다. 그 나라들을 영웅에 대치하는 악의 표상으로서 존재시키면서 미국의 사회적 구조에 내재한 정치적 메커니즘으로서 표출, 작용시킨다. <World War Z>에서는 좀비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조치로 북한이 국민들의 이빨을 모두 뽑아버리는 등의 다소 조야하고 미숙한 얘기들이 나옴으로써 희화화시키고 미개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유머로서 존재하는 예술의 장치로 웃으며 넘겨버리는 순간에 그 사고는 우리의 뇌를 잠식하고, 우리는 차이와 차별의 벽을 넘나들게 된다. 본인이 주체가 되어 그것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 순간 그것을 만든 주체에 의해 잠식되어버리는 것이다. 비록 북한이 독재 지도자 김정은에 의해서 만행을 저지르며 국제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하나, 북한 사람들 전부를 일반화 시켜 낙인 찍고, 스티그마로써 다루는 것은 명백히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의심치 않고 즐기는 것 역시 방관의 차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차이와 차별의 경계는 누군가의 자유로운 표현과 부딪히는 접점 어딘가에 존재하기 쉽다. 그렇기에 자유는 우리에게 개성과 자기표현이라는 은혜로움을 선사해줌과 동시에 오만과 편견이라는 무지를 동시에 주는 위험한 매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차이와 차별간의 그 복잡하고 미묘한 경계에서 정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해 인지하고, 고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고심이 고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실천의 영역까지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가 평생 근무했던 ‘라 보르도 클리닉’에 관한 다큐멘터리 <라 보르도 클리닉의 하루>는 실재했고, 이어지고 있는 현상으로, 픽션보다 더욱 큰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이곳은 치료로서 약물의 투여와 사용까지는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 치료를 위해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고정시키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정신분열을 가진 그들과 그들과 함께 살려는 자들이 모여 ‘환자’ 혹은 ‘의사’와 같은 관계와 역할을 붕괴하고,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일상생활을 지켜나간다. 그들은 같이 무대를 만들어 연극을 해내고, 그림을 그리고, 식사를 만들며 어느 순간에는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은 자’, ‘정신분열증에 걸린 자’ 구분조차 어려운 기묘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실제로 폭력성이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것만 같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라벨링되고, 엄격하게 사회에서 배제되고, 억압되어 온 존재가 아닌가? 이렇게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남아있으나,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담론화 되어지지 않는 보이기 힘든 차별의 세계를 감지하고, 바꿔나가는 노력과 실천력을 겸비하는 것만이 내가 포함되어있는 사회가 진정한 차이에 의한 자유와 자기개성이 존중 받는 사회로 진전하는 소중한 걸음일 것이다.

今はそうではないが、この数年間、完全菜食主義者である'Vegan'で生活してきた。社会でもマイノリティとして生きてみたら、その前には感じられなかった視線と、他人の考えを意識するようになる本人をより明確に感じることができた。 まるで感覚の一つを失って他の感官を活性化させられたように、悪意のない他人の本人への疑問や感情が鋭敏に感じられて不便だった経験がある。 どうしてマイノリティーはマジョリティを理解させたり、あるいは社会に本人を説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マジョリティは本人が食べる食べ物に理由を一つ一つ説明しなくても誰も聞かない。そのとき、私はその誰かの悪意が込められなくても、むしろ違いを認めようとする試みからくる好奇心、あるいは好意ても、あるいはそれが比較的軽い程度の違いの上程に止まっても、差別になることができる潜在性を無限に感じた。もちろん、社会的にはもっと物理的に不便だし、保護を受けられないケースが多い。 自由があることに差異も存在することが自明である。しかし、差異が差別に発現される瞬間は、どのように規定す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それぞれの保障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自由と、そして社会において、その自由性による越権あるいは過剰が差別につながる微妙な境界はどのように調整されてしかるべきか、その微妙な構造を様々な芸術作品などを通じて判断してみたらもっと明瞭性を持つようになるかもしれない。

パク・チャヌク監督の映画<お嬢さん、2016>は幼い時に両親を失い、後見人の厳格な保護の下で生きる貴族のお嬢さん (日本人)に新たな下女(朝鮮人)が訪れ、お嬢さんの富を奪い取るために騙す中に恋に落ちてかえって富を奪おうと謀議した一味を再び騙す話である。一見、ストーリーだけでは享楽的映画で見られるが、わが社会が持っている様々な差別から派生した奇形的な構造を何層で如実に見せている。植民地主義、帝国主義によって発生した従と主の関係が日本人女性と、朝鮮人下女で表現されている。また厳格な保護を受けているお嬢さんは事実は後見人によって密室で男性たちにわいせつ的な説話を読んでくれる女性、すなわち、男性たちの欲望を入れる器として生きてき、女性を抑圧する男性の家父長的で、暴力的な姿で男性中心であり、差別が蔓延して不平等した近代社会の姿を見せている。しかし、その過程で下女は、お嬢さんに憐憫と同情、恋を感じるようになって、二人は愛(同性愛)に陥る。そのようにあの二人は従と主の関係から脱却して、同性愛というコードとして差別から派生した構造と抑圧から自由を得る。昨年のアカデミー賞を受賞したBarry Jenkins監督の映画<MOONLIGHT、2016>も確かに、一人の弱く、小さな黒人の子供が少年から青年に成長していく過程で青く、致命的な愛と性アイデンティティについての話で、多くの話が含まれているが、本人が差別として注目した部分は'ブラック'として、黒人青年が本人が自ら性的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確立する以前に、弱く、いじめられた黒人少年'シャイロン'が同い年の集団の暴力性によってセクシュアリティが規定されて抑圧されるようになる部分だ、なぜ小さく、力のない社会的弱者は'ゲイ'と規定す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また、月の明かりの下で誰でも青く反射され、その月の下で黒人'シャイロン'の青さを反射する黒い肌で黒人社会の至難さや寂しさもうかがうことができる。前の二作品は現在、我々の世代がどの程度の差別と自由に対する認識を持っているかに対する指標として作用する。今、私たちが普遍的に談論化させていることから価値の軸がどの程度に来ているのか推測できる。しかし、偏見や先入観があるほど遅く見えるようになる真実のようなもののように最も用心して警戒すべきことは自明な水準の差別でなく、経度水準の 差別である。 <World War Z、2013>を筆頭にしたハリウッド発災害、戦争映画や、marvel社のヒーロー映画のような場合、頻繁に北朝鮮やイラクなどの国を登場させる。その国を英雄に対峙する悪の表象として存在させ、米国の社会的構造に内在した政治的メカニズムとして表出、作用させる。<World War Z>ではゾンビウイルスの拡散に対する措置として、北朝鮮が国民の歯を全部抜き取ってしまうなど、粗野であり未熟な話が出たことによって、戯画化させ、野蛮なニュアンスを伝えたりもする。ユーモアとして存在する芸術の装置で笑って飛ばしてしまった瞬間にその思考は、我々の脳を蚕食して、我々は差異と差別の壁を越えることになる。本人が主体となってそれを作っていなくても、素直に受け入れて疑問を持たな い瞬間にそれを作った主体によって蚕食されてしまうことである。たとえ北朝鮮が独裁指導者のキム・ジョンウンによって蛮行を犯し、国際社会に混乱を引き起こしているとはいえ、北朝鮮の人々全てを一般化させて烙印を押して、スティグマとして扱うのは、明らかに'差別'と言える。そしてそれを見て疑わず、楽しむことも、傍観の差別と見られる。

このように差異と差別の境界は誰かの自由な表現と打つかる接点のどこかに存在しやすい。そのため、自由は我々に個性と自己表現という恩恵をプレゼントしてくれると同時に傲慢と偏見という無知を共に与えられる危険な媒体でもある。そのため、差異と差別間のその複雑で微妙な境界から、正道を守るためには、本人が持っている自由に対して認知し、苦心する必要がある。そしてその苦心が苦心で終わるものでなく実践の領域まで続くことが重要である。フェリックス・ガタリ(Felix Guattari)が一生を勤めた'ラ・ボルドークリニック'に関するドキュメンタリー<すべての些細な事柄, 1996>は実在し、続いている現象で、フィクションよりさらに大きな力を持って私たちにお手本となっている。精神分裂症を持った人達がいるここは治療として薬物の投与と使用までは否定してはいないが、その治療のために彼らの社会的役割を固定させたり、抑圧したりはしない。精神分裂を持った彼らと彼らと一緒に生きようとする者たちが集まって'患者'あるいは'医師'のような関係と役割を崩壊し、彼らなりの方法で日常生活を守っていく。彼らは一緒に舞台を作って演劇を作り出し、絵を描き、食事を作りながら、ある瞬間には'精神分裂症にかからなかった者'、'精神分裂症にかかった者'区分し難しい奇妙な光景を作り出す。彼らは実際に暴力性や、社会的物議を起こしそうな偏見と先入観で、ラベリングされ、厳格に社会から排除され、抑圧されてきた存在ではないか? こんなにまだも我々の社会に漫然に残っているが、依然として保護されずに談論化されない見せられにくい差別の世界を感知し、変えていく努力と実践力を併せ持つことだけが我々が含まれている社会が真の差異による自由と自分の個性が尊重される社会に進展する大切な動き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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