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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yeowool

사회 안의 예술 그리고 예술의 기능(社会の中の芸術、そして芸術の機能)


지난 6월, 입체 설치 작품을 위해 잠시 모국에 귀국했던 일이 있다. ‘peace on the 21st century’ 라는 입체작품을 ‘노동당사’라는 아픈 전쟁역사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건물의 앞에 설치한 작품이었다. 현재 건물은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어, 건물을 관리하고 있는 국가 기관에 정식적으로 협조 요청을 보내, 5일간 건물의 앞에 설치하기로 예정되어있었으나, 설치당일, 실제로 둘러본 관계 공무원들의 판단 하에 하루라는 아쉬운 짧은 전시기간을 가지고 철거하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공무원들의 미숙한 일 처리가 가장 큰 것이었다. 본인이 전시하기로 요청하고 허가 받은 기간 내에 두 개의 행사가 한 공간에 함께 겹쳐있었고, 이를 국가기관에서 숙지하고 있지 않았던 점, 여러 행사간의 마찰이 빚어졌고, 또 그 많은 행사들로 인해 평소보다 많은 수의 관광객들의 유입이 예상되므로 작품이나 관람객, 양측의 모든 안전상의 문제가 우려된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본인으로써는 예술을 행하고, 자유롭게 발표할 권리가 무시되었고, 그리고 이미 만들어지고 전시 되어진 작품에 대한 정신적 훼손이라고 할 만큼, 사회적 안정을 위해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경시되어지는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말의 본인의 책임이 없었는가 하는 문제가 이후에 생각되기 시작했다. 예술과 관람자 이렇게 이분 되어진 차원에서 고려하고 만들었을 뿐 중요했던 공간으로서의 사회가 배제되어있었다. 일반적인 화이트큐브에서의 전시와 차이를 인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본인의 아픈 경험을 토대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목적의 공간이 아닌, 생활의 현장, 혹은 사회라는 제 2의 전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설치예술에 있어서, 예술가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조건들과 그에 의한 조화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커뮤니티 아트와 화이트 큐브에서의 전시와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예술을 관람하는 주체의 자의성, 타의성의 문제일 것이다. 미술관, 박물관등은 관람자 본인의 의지에 의해 예술 작품을 관람을 하는 것과 달리, 커뮤니티 아트의 경우 관람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술작품의 관람에 노출되고는 한다. 관람자 본인이 거시적으로 봤을때, 예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미시적으로는 작품생산주체인 예술가의 사상과 다른 사상 혹은 문화 등을 가지고 있더라도 불가피하게 수용되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예술생산의 주체가 인지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다고 예술가가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을 포지셔닝하고, 그에 맞는 작품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노출 당할 수 있는 관람객의 여러 배경과 지식 제반에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와 노력과 같은 책임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예술의 성격 역시 문화의 선단에 있고 영향력을 가진 만큼 충분한 책임의식을 필요로 하지만, 특히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특정의 인간들을 관람자의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커뮤니티 아트’에서의 예술가가 가져야 할 책임의식은 더욱 높아야 함이 자명하다.

위의 아젠다처럼 우연히 마주하게 된 예술작품에서, 가장 큰 컨텍스트는 아마도 그 환경적 성격과 관련되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불특정의 관람객이 그곳에서 예상치 않은 작품을 마주했을 때는 ‘왜 그것이 여기에 있는가?’의 물음으로부터 주변환경들의 조건이 파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차원의 환경적 조건들과 예술작품을 같이 상정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들은 가끔, 굉장히 폐쇄적이고 편협한 시각과 본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할 때가 많다. 본인은 예술이란 것이 다 같이 통용되고, 공유되는 일반적 것들을 향유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로벌리즘이라고는 하나 다원적 문화와 가치가 존재하고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같이 살아감에 필요한 여유와 향락적 문화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 여러 차원에서 예술을 함께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예술의 미덕이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커뮤니티 아트는 더욱 넓은 범위의 관람객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큰 두 맥락으로 커뮤니티 아트에서의 예술수용자의 관점에서 고찰해보았다. 타의에 의해 관람자의 역할에 놓이고, 우연히 마주하게 된 예술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맥락적 관점, 이 두 개는 결코 쉽게 이해 될 수 없으며, 많은 고찰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미술관에서 벗어나 사회와 결합될 때 다차원적으로 심화된 커뮤니케이션적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 역시 따라와야 할 것이다. 커뮤니티나 예술은 통일성이나 일원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다양성과 다원성의 가치를 지향하고 그것들의 조화를 요구하며, 그것이 곧 예술과 사회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우리가 그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가져야 할 기본적 인식과 또 고양시켜야 할 것들을 명료히 해두고 예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사회에서 기능하고 함께 존재함일 것이다.

この6月、立体の設置作品のためにしばらく間母国に帰国したことがある。 'peace on the 21st century'という立体作品を'労働党舎'という痛い戦争、歴史の象徴として残っている建物の前に設置した作品だった。 現在、建物は、国家次元で管理しており、建物を管理している国家機関に正式的に協力要請を送って、5日間、建物の前に設置することが予定されていたが、設置当日、実際に見て回った関係公務員の判断の下に一日という残念な短い展示期間を持って撤去するようになった。 その理由としては、公務員たちの未熟な仕事の処理が最も大きいのだった。 本人が展示することを要請して許可した期間内に二つの行事が一つの空間に一緒に重なっており、それを国家機関で熟知していなかった点、多くの行事間の摩擦が起き、またその様々な行事によって普段よりも多くの観光客の流入が予想されるため、作品や観覧客、両者の全ての安全上の問題が憂慮されるという点だった。 そして、本人としては芸術を行い、自由に発表する権利が無視され、そしてすでに作られて展示された作品に対する精神的破壊だといえるほど、社会的安定のため個人の権利と自由は軽視されることに大きな傷を受けた。 しかし、その過程で一抹の本人の責任がなかったのかという問題がその後に考えられ始めた。 芸術と観覧者、このように二分された次元で考慮して作っただけで重要だった空間としての社会が排除されていた。 一般的なホワイトキューブでの展示との違いを認知しなかったことだ。 これに本人の痛い経験をもとに芸術作品を展示する目的の空間がなく、生活の現場、あるいは社会という第2の展示空間でおこる設置芸術において、芸術家が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条件と、それによる調和について考察してみよう。

コミュニティアートとホワイトキューブでの展示との最も大きな違いだとすれば、芸術を観覧する主体の自意性、他意性の問題だろう。 美術館、博物館などは、観覧者本人の意志によって芸術作品を観覧をするのとは違い、コミュニティアートの場合、観覧者本人の意志とは関係なく芸術作品の観覧に露出されたりする。 観覧者本人がマクロ的に見た時、芸術に関心がいなくても、ミクロ的には作品の生産主体である芸術家の思想と異なる思想あるいは文化などを持っていても避けられないように収容されてなりかねないという点だ。 この点が芸術の生産の主体が認知しなければならない重要な問題だ。 そうだとして芸術家が不特定多数の観覧客をポジショニングし、彼らにかなう作品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 ただ、露出される恐れがある観覧客の様々な背景と知識の諸で充分に考えて見られる余裕と努力といった責任意識が必要だと思う。 元の芸術の性格も文化の先端においており、影響力を持っただけに、十分な責任意識を必要とするが、特に本人の意志とは関係なく不特定の人間たちを観覧者の状況に置かれるようになる'コミュニティアート'での芸術家が持つべき責任意識はさらに高く必要となることが自明だ。

上のアジェンダのように偶然に向き合うようになった芸術作品で、最も大きなコンテキストはおそらくその環境的性格と関連される可能性が非常に大きい。 不特定の観覧客がそこで予想しなかった作品を合わせた時は'なぜそれがここにあるのか?'の問いから周辺環境の条件が派生するためだ。 このため複数の次元の環境的条件と芸術作品を一緒に上程する必要がある。 芸術家たちはたまに、とても閉鎖的で偏狭な見方と本人たちだけのコミュニティを形成する時が多い。 本人は芸術というものがともに通用されて、共有される一般的なのを享受するためのではないと思う。 グローバリズムとはいえ、多元的文化と価値が存在し、それらが一緒に交わって一緒に生きるということに必要な余裕と享楽的文化が芸術と思う。 時間と空間と人間、複数の次元で芸術をともに、理解して行うのは芸術の美徳であり、役割だと思う。 特にコミュニティアートは、さらに広い範囲の観覧客を包容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ている。

このように大きな二つの脈絡とコミュニティアートでの芸術の収容者の観点から考察してみた。 他意によって観覧者の役割に置かれ、偶然に向き合うようになった芸術作品で感じられる文脈的な観点、この二つは決して簡単に理解できることができず、多くの考察を必要としていると思う。 芸術は美術館から脱して、社会と結合した時、多次元的に深化したコミュニケーション的観点で扱わ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の過程でコミュニティに対する理解も同様について来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 コミュニティや芸術は統一性や一元性を志向するのではなく、多様性と多元性の価値を志向してそれらの調和を要求し、それがまさに芸術と社会の存在理由でもある。 芸術家として、我々がその価値を守っていくために、持つべき基本的認識とまた高揚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明瞭にしておいて芸術を行うことが真に社会で機能し、共に存在するの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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