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in yeowool
부도덕한 예술은 예술로써 떨어지는가? 부도덕하지만, 그러한 까닭으로 뛰어난 예술이 있는가?-예술의 미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不道徳な芸術は、芸術として劣っているか? 不道徳であるがゆえに
먼저 부도덕한 예술을 예술로써 바라보는 자세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성립하고 있는 본인 고유의 도덕관이 있을 것이며, 그 개인 고유의 도덕관이라는 경계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예술에의 예술적 이해는 도덕관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예술에의 이해보다 이성적 판단의 활성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덕주의관점에서의 도덕이냐, 혹은 부도덕함이냐가 아닌 예술로써 떨어지는가 뛰어난가를 묻는 것이 질문의 주체라면 보다 다원적인 판단의 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도덕적 판단이 예술의 가치를 이해하는 일부 요인일 수는 있으나 불가결의 필수 요인일 수도 없으며, 도덕적 가치만으로 이분화 시켜 예술로써 떨어진다, 우수하다를 나누는 것은 아주 분리적인 사고이며,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작품 개별마다 가치판단의 기준은 여러 차원에서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위계적인 가치판단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평가는 여러 차원에서의 가치판단이 이루어지며 이것들은 보통 아주 종합적으로 판단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문제 ‘부도덕한 예술은 예술로써 떨어지는가? 혹은 그러므로 뛰어난 예술이 있는가’에 대한 일원적이며, 일반적인 대답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본인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예술들의 여러가지 실례를 통해 그 예술가치의 판단에 도덕성이 어느정도 관여하고 있으며, 혹은 관여하지 않으며, 그것이 예술로써 어느정도의 가치를 지니느냐는 개인적으로 판단해 볼 수 있을것이다. 분명 예술의 가치가 단적으로 한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 가치가 인간-각 개인의 집합-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있다면 부도덕함이 때로 인간의 인식의 확장과 심화된 감정의 경험을 촉발시킬 수 있을것이다. 혹은 그 가치가 인간-집합에 속한 개개인-의 삶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있다면 당연시 부도덕함의 예술이 큰 방해적 요소가 되거나 부정적 효과를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김기덕감독의 영화 <피에타>는, 제목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자비와 용서,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무자비한 폭력과, 자신을 버린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여성을 인정하는, 혹은 입증하는 과정에서 여성에게 살을 먹이거나, 성폭행하는 모습, 이미지 그 자체로서 굉장히 부도덕함을 여실히 내보이고 있다. 같은 해에 나온 <뫼비우스>같은 경우도 본인의 외도로 인해 가족의 삶을 망쳐버린 남성의 성기절단 자해와 같은 자극적인 미장센들로 인해 상영제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본 뒤에는 부도덕함을 목격한 불쾌함이 자리를 채우기 보다는, 엄밀히 말하면 어떤 불편한 감정들이 남아있게 된다. 끝없이 탐구하고자 하는, 혹은 형이상적인 어떤 감정들의 세밀한 이해를 욕망하는듯한 불편함이다. 이미지 자체로 굉장히 충격적이고 자극적이며, 시각적, 정신적 폭력을 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나, 부도덕함이 남기는 여운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그것은 이미지로써의 부도덕함, 즉 작품 내에서 표명, 혹은 표현하고 있는 부도덕함보다 간접적으로 지각적 경험을 함으로써 관람객의 인지 확장 또는 감정적 심화 같은 영향이나 효과적 측면에서 부도덕함의 예술이 가치를 평가 받을 수 있게끔 한다.
반면, 2012년 아사가야에서 행해진 성기흡식회 퍼포먼스같은 경우는 역시나 같은 이미지적 맥락에서 외설적이며, 잘라진 성기나, 인육을 먹게 하는 것 등 굉장히 같은 부도덕함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앞선 작품과는 다르게 굉장한 불쾌감을 상기시킨다. 예술가로써 삶을 영위하는데 본인에게는 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부분에 일부 이해함에도 이 퍼포먼스의 순수성의 문제에 의구심을 품게 한다. 어떤 집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점이나, 잘려진 성기를 구워 지하실에서 팔고, 나눠먹고, 레시피를 공개하는 등의 많은 작위적이며 공개적인 행위들은 작품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의미 등에 불순함을 더하는 장치였으며, 더욱이 작가나 작품 본인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에서 참여 혹은 관람한 관람객에게 그 부도덕함이 어떤 의미작용을 했는가에서 더욱 큰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참석자들의 참여리뷰에서는 단순 호기심이나 자극적 경험에의 욕망, 이벤트성 경험 등의 느낌들이 짙었고, 어떤 퍼포먼스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인식의 부족뿐 아니라, 도덕적 인지 역시 배제된 채 참여하는 것으로 보였다. 혹여, 이 작품으로 인해 관람객에게 욕망실현의 쾌락이나, 인지능력의 확장, 경험의 확대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작품의 가지고 있는 전위성에 비해 그 함의나 부도덕함의 사회적인 영향들이 더 큰 효과를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점이 매우 미숙하고, 예술 작품으로서 받아들이기에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되었다.
앞선 작품들 내에서 표현되고 있는 부도덕함은 모두 이미지 그 자체들로써 굉장한 시각적, 정신적 쇼크를 안겨주며, 분명 사회적으로 내면적 준칙원리나 규범 등에 저촉하는 불편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선 작품 내에서는, ‘표현으로서의 부도덕함’과 ‘표상으로서의 부도덕함’으로 그 작품들간의 예술적 가치는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같은 부도덕함이 기반한 작품들이지만 가치판단에서는 분명 그 부도덕함의 판단 지표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가치에 도덕적 판단은 필연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으며, 또 일률적이지 않다. 미묘한 예술적 구조에는 그에 따른 미묘한 가치 판단의 요소들이 존재한다. 또 그 미묘한 요소들에 의해 관람객에게 다가와 표명된다. 도덕적 판단이 예술적 가치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에는 도덕적 판단 이외에도 가늠해 볼 수 있을 만한 여러가지 판단요소가 존재하며, 그러한 예술작품 주체의 판단요소 이외에도 분명히 관람자 개개인으로부터 나오는 여러가지 차원의 요인들이 작용할것이다. 또한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써 예술을 대하는 가장 부도덕함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先に不道徳な芸術を芸術として見つめる姿勢を認識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 人間は自分が成立している本人固有の道徳観があるのであり、その個人固有の道徳観という境界の内部に存在している芸術への芸術的理解は道徳観の外に存在している芸術への理解より理性的な判断の活性度が下がりかねないと思う。 しかし、道徳主義の観点での道徳か、あるいは不道徳かではなく、芸術として劣っているか優れているかを問うのが質問の主体なら、より多元的な判断の基準があると思う。 道徳的判断が芸術の価値を理解する一部の要因ではあるが、不可欠の必須要因でもなく、道徳的価値のみで二分化させて芸術として劣る、優れるを分けることはとても分離的な思考であり、正しい方法ではないと考えられる。 作品、個別のたびに価値判断の基準はいくつかの次元で生じかねないと思い、作品の全体を貫通するいかなる位階的な価値判断の秩序は存在しないと思っている。 芸術の評価はいくつかの次元での価値判断が行われ、これらは通常、極めて総合的に判断できると思う。 つまり、問題 '不道徳な芸術は芸術として劣っているか? あるいはそれゆえ、優れた芸術があるのか'に対する一元的であり、一般的な答えはありえないと思う。 ただ、本人が道徳に反すると考える芸術の数々の実例を通じてその芸術の価値の判断に道徳性がどの程度関与しており、あるいは関与せず、それが芸術でどの程度の価値を持つかを個人的に判断できるだろう。 確かに芸術の価値が端的に一か所にいると言えないし、その価値が人間(各個人の集合)の暮らしを豊かにするのにあれば、不道徳なことが時に人間の認識の拡大と深化された感情の経験を触発させ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あるいはその価値が人間(集合に属した個々人)の生の秩序を確立するのにあれば当然に、不道徳なことの芸術が大きな妨害的な要素になったり否定的な効果を及ぼすこともできると思う。 キム・ギドク監督の映画<ピエタ>は、タイトルでみられるように慈悲と容赦、救援に関する話であり、その過程で起きられる無慈悲な暴力と、自分を捨てた母親と主張する女性を認定する、あるいは立証する過程で、女性に、人肉を食べさせたり、性的な暴行する姿、イメージそのものとしてとても不道徳さを如実に見せている。 同年に出た<メビウス>のような場合も、本人の浮気によって、家族の人生を台無しにしてしまった男性の性器の切断自害のような刺激的なミジャンセンによって上映の制限を受けたりもした。 しかし、彼の作品を観た後 は不道徳さを目撃した不愉快さが席を満たすことよりは、厳密に言えば、いかなる不便な感情が残ることになる。 果てしなく探求しようとする、あるいは形而上的ないかなる感情の細密な理解を欲望するような不便だ。 イメージ自体でとても衝撃的で刺激的であり、視覚的、精神的な暴力を与えた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が、不道徳さが残した余韻が必然的に存在するようにする。 それは、イメージとしての不道徳さ、つまり作品内で表明、あるいは表現している不道徳さよりも、間接的に知覚的に経験をすることで、観覧客の認知の拡大または感情的な深 化のような影響や効果的な側面で不道徳さの芸術が価値を評価を受けられるようにする。 一方、2012年阿佐ヶ谷で行われた性器喫食会パフォーマンスのような場合はやはり同じイメージ的な脈絡でわいせつ的であり、切れた性器や、人肉を食べさせることなどとても同じ不道徳さを見せていることでも先に見せた作品とは別に凄すぎる不快感を想起させる。 芸術家として生を営むのに、本人には性が必要ないという部分に一部理解することにもこのパフォーマンスの純粋性の問題に疑問を抱くようになる。 いかなる集会的な性格を持っている点や、切り分けた性器を焼いて地下室で売って、分けて食べ、レシピを公開するなどの多くの作為的であり、公開的な行為は、作品が持つ象徴性や、意味などに不純さを増している装置であり、さらに、作家や作品、本人の領域を離れた部分で参加あるいは観覧した観覧客にその不道徳なことがどんな意味作用をしたのかでさらに大きな問題が発生したと思う。 実際に多くの参加者の参加レビューでは単なる好奇心や刺激的な経験への欲望、イベント性の経験などの感じが濃い、どのようなパフォーマンスの一員として参加するという認識の不足だけでなく、道徳的認知も排除されたまま参加するように見えた。 もし、この作品によって観覧客に欲望の実現の快楽や、認知能力の拡張、経験の拡大を起こしたとしても全体的に作品の持っている前衛性に比べてその含意や不道徳さの社会的な影響がさらに大きな効果を抱かせ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点を考慮しなかった点が非常に下手して、芸術作品として受け入れることに限界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た。 先の作品内で表現されている不道徳なことはすべてイメージそのものたちですごい視覚的、精神的なショックをもたらし、確かに社会的に内面的な準則原理や規範などに抵触する不便な要素を持っている。 しかし、先の作品内では、'表現としての不道徳なこと'と'表象としての不道徳なこと'でその作品間の芸術的な価値は変わったと思う。 同じ不道徳さが基盤した作品だが、価値判断では、確かに、その不道徳さの判断指標が違っ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る。 したがって、芸術の価値に道徳的な判断は必然的でなく、体系的ではなく、また、一律的ではない。 微妙な芸術的構造にはそれによる微妙な価値判断の要素が存在する。 また、その微妙な要素により、観覧客に迫って表明されている。 道徳的な判断が芸術的な価値とは無関係だと言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 しかし、芸術の価値には、道徳的判断以外にも判断して見るに値する様々な判断要素が存在し、そのような芸術作品主体の判断要素以外にも確かに観覧者の個々人から出てくる様々な次元の要因が作用することである。また芸術を志向する人で、芸術に対する最も不道徳さは何かについて考えるようになる。